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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작

<핵소 고지>, 평화와 폭력 그 사이의 어중간함.

  

  영화 <브레이브 하트>로 유명한 멜 깁슨의 장편작 <핵소 고지>이다. 작품의 주 배경은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에서 벌어졌던 '핵소 고지' 전투이며 주인공은 실제 참전 용사였던 '데스몬드 도스'이다. 그리고 작품의 주요 줄거리는 실제 인물 '데스몬드 도스'가 당시 전장에서 행했던 영웅적 행보의 일대기이다.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역동적 전장 시퀀스다. 오키나와에서 벌어지는 20분가량의 전장 시퀀스는 작품 <블랙 호크 다운>의 시가전과 견주어도 큰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 전장이라는 현장은 그 현장의 특성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상당한 몰입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로감 또한 동반한다. 그렇기에 20분가량의 긴 전장 시퀀스를 연출할 경우, 유려히 완급 조절을 하지 못한다면 상당한 피로감으로 인해 작품의 긴장감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핵소 고지>의 경우는 전장 쇼트의 신속한 전환을 통해 전장 시퀀스를 수려히 전개하였으며 사실적 묘사, 고증을 통해 당시 오키나와 전장의 현장감을 충실히 구현하였다.

 

  모순적이게도 작품의 아쉬웠던 지점 또한 전장 시퀀스에서 드러난 주제 의식의 애매모호함이었다. 작품의 주인공이 신앙적 신념에 따라 집총 및 폭력을 거부한 인물이었다는 점. 그러한 주인공이 폭력이 만연한 전장에서 어떠한 폭력 없이 75명의 생명을 구출한 과정을 전기적으로 연출한 지점은 해당 작품의 주제 의식이 '반전'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낸다. 그렇기에 작품의 제목이 된  '핵소 고지'의 전장 시퀀스에서도 이 같은 '반전' 이미지가 극대화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정작 그 시퀀스를 봤을 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전우의 시체를 방패막이 삼아 BAR 소총으로 일본군을 도륙하는 미군. 사살당하는 일본군들을 슬로우로 연출하며 마치 볼링공을 연상케 한 연출에서는 그 어떤 '반전'의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장엄한 음악, 숭고한 연출에서는 전장을 거룩히 묘사하려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이분법적 선악 구도는 폭력을 독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수히 전장 시퀀스를 즐기고 싶다면 해당 작품이 만족스럽겠지만 그 외의 경우엔 불만족스런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